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원 (문단 편집) ===== 3차 ===== 주로 1970년대를 주름잡던 주요 시리즈로 보면 된다. 전반적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내놓은 성격이 강하다. 경제규모의 팽창이 점진적으로 가속화되고 [[오일 쇼크]]의 영향으로 물가상승률이 높은 수준을 기록하여 원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서 오십원, 백원 주화가 발행되며 서서히 지폐를 밀어냈다. 또한 이때 천원, 오천원, 만원권 지폐가 처음 나오면서 고액권 지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. ||<-2> || 앞면 || 뒷면 || || [[파일:다 오백원.jpg|width=100%]] || (다) 오백원[br](1973. 9. 1.) || [[이순신]], [[거북선]] || [[현충사]] || || [[파일:가 천원.jpg|width=100%]] || (가) 천원[br](1975. 8. 14.) || [[이황]], [[무궁화]] || [[도산서원]] || || [[파일:가 오천원.jpg|width=100%]] || (가) 오천원[br](1972. 7. 10.) || [[이이(조선)|이이]], [[봉화]] || [[한국은행]] 본관 || || [[파일:나 오천원.jpg|width=100%]] || (나) 오천원[br](1977. 6. 1.)[* [[1977년]] 5월 7일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viewer/common/archWebViewer.do?singleData=N&archiveEventId=0028089606#12|신5000원권 발행공고(한국은행)]].] || [[이이(조선)|이이]] || [[오죽헌]] || || [[파일:가 만원.jpg|width=100%]] || (가) 만원[br](1973. 6. 12.) || [[세종대왕]], [[무궁화]] || [[경복궁 근정전]] || || [[파일:나 만원.jpg|width=100%]] || (나) 만원[br](1979. 6. 15.) || [[세종대왕]], [[자격루]] || [[경복궁 경회루]] || * 3차에 속하는 지폐들의 정확한 등장 순서는 가 오천원권 → 가 만원권 → 다 오백원권 → 가 천원권 → 나 오천원권 → 나 만원권 순서이다. 신토불이의 정신으로 수입산을 버리고 국내산을 쓰자는 운동이 크게 벌어지면서 적극 도입된 결과이며, 근본적인 도입 목적이기도 하다.[* 반은 농담이지만, 자존심이 어느정도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. 유출되는 외화도 절약할 겸.] 1966년 처음 원화 동전(1원, 5원, 10원)을 생산하면서 이전권 저액 지폐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. 5천원권은 영국 데라루의 원판을, 1만원권은 일본 조폐국[* 당시 일본 엔 지폐를 발행한 대장성조폐국 에서 사용했는지는 불명.]의 원판을 사용하여 찍어냈기 때문에 둘 다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. 이이의 이목구비는 서양인에 가까운 모습이고, 그나마 세종대왕의 존안은 동양적인 외모로 그려졌다. || [[파일:attachment/대한민국 원/10000wonsample.jpg|width=100%]] || || [[박정희]]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1만원권 시제품 || 원래 1만원권은 5천원권과 동시에 내놓을 예정이었으나 1년 늦게 등장했다. 그리고 디자인도 당초엔 달라서 앞면에는 [[석굴암]]의 본존불상, 뒷면에는 [[불국사]]가 들어갈 예정이었다. 참고로 불국사의 경우에는 복원사업 완료 이전이라 지금과 모습이 좀 다르다. 원판이 완성되고 시제품[* 정식 용어로는 시쇄(試刷)권이라고 한다.]을 찍어내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의 재가를 받고 친필서명까지[* 이 실물은 옛 한국은행 본관 화폐금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.] 받아낸 다음 공표하였지만, 양대 종교단체 모두의 반발을 감안하지 않은 탓에 심한 반발로 무산되었다. 기독교계는 '불교만 편애한다'는 이유로, 불교계는 '신성한 [[불상]]을 세속의 상징인 돈에 올릴 수 없다'는 이유로 각각 반대했다.[* 그런데, 정작 [[십원화|십원 주화]]에는 [[다보탑]]이 들어간다. [[불탑]]도 [[불상]]처럼 [[부처]]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불상이 안 되면 탑도 같이 안 돼야 정상인데... 이 쪽은 2020년대까지 멀쩡히 수십년간 쓰이고 있고 불교계도 기독교계도 딱히 크게 반대하지도 않는다. 아무래도 중요도가 낮은 소액권이다보니 만원짜리 지폐에 비해 관심도가 낮아서 그냥 통과된 듯 하다. 정책 결정에 일관성이 없었던 셈이다. 비슷한 사례로 서울 [[봉은사]] 인근 교회들이 [[봉은사로|자기 주소에 봉은사가 들어가는 것]]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[[봉은사역|인근 전철역 이름]]에 봉은사를 집어넣겠다고 하자 들고 일어난 적이 있다.] 결국 처음부터 다시 만드느라 1년 늦게 나왔다. 하지만 이미 주문한 용지까지 폐기할 자금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인쇄되었다. 덕분에 가 만원권 왼쪽 은화의 석굴암 본존불상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.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14&oid=042&aid=0000001011|관련 기사]]. 참고로 1천원권의 경우는 모종의 이유로 늦어져 내놓을 시기를 놓쳐버렸고, 나 오천원/만원이 나올 시기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. 다 오백원권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기호 2자리 + 숫자 8자리 일련번호를 사용한 지폐가 되었다. 이 지폐 이후에 나온 모든 지폐에는 기호 3자리 + 숫자 7자리의 일련번호만 사용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